김와플

브런치 소설가,에세이스트,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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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와플 프랜차이즈를 운영했고 지금은 자전거로 배달을 하고 있습니다.어릴 적 쓰다 만 소설을 다시 꺼내 들면서 잊고 지냈던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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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달을품은 바다는 별을 기억하지 않는다

3분 픽션

IF:뒤틀린 한국사

오버컴1부

데스티니트리거2부

데스티니트리거1부

에세이

열 권을 한 권으로

배달 통 뒤에서 다시 쥔 연필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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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문의

작품

<달을 품은 바다는 별을 기억하지 않는다>
물이 모든 사람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곧 법이 되는 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모르는 아이가 태어난다. 존재를 증명할 수 없어 물건으로 취급받던 열여섯 소녀가 팔백 년 전 달을 태운 자의 비밀을 쫓아가는 여정을 그린 한국형 판타지. 기억과 망각 중 무엇이 축복인지 묻는 조선풍 세계관 장편

<데스티니트리거>
태어날 때부터 완벽하도록 설계된 인간과, 시련 속에서 스스로 삶을 선택하는 인간. 갈라진 두 문명이 은하의 패권을 다투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그 인위와 자유의 대립 한가운데 선 젊은 파일럿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SF 스페이스 오페라

<오버컴>
‘결함이 곧 능력’이 되는 다크 히어로 세계관에서, 밑바닥 배달 라이더가 우연히 각성해 거대 기업의 실험 은폐 공작과 맞서는 이야기. 화려한 능력자 전대물이 아니라, 계급 격차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루는 사회비판형 히어로물

<배달통 뒤에서 다시 쥔 연필>
벨기에·일본·홍콩에까지 이름을 알렸던 와플 프랜차이즈 대표가, 코로나와 사람들의 배신 앞에 모든 걸 잃고 배달 라이더가 되기까지의 기록. 화려한 성공담도, 신파적인 실패담도 아닌, 그 밑바닥에서 계산 없이 다시 펜을 쥐게 된 회복의 과정을 담담하게 밀고 나간 자전적 에세이

<IF: 뒤틀린 한국사>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갈림길 30곳을, 실제 역사(Fact)와 다른 선택을 한 평행세계(Fiction)로 엮은 옴니버스 대체역사 소설.매 화 다른 시대·인물·문서 형식으로 “만약 그때 다른 길을 갔다면”을 그리며, 지금의 당연한 일상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졌는지를 되짚음.

<열 권을 한 권으로>
작법서 여러 권을 한 권으로 다시 만든 기록. 이론 요약이 아니라, 자기 원고의 고치기 전과 후를 나란히 놓고 어디서 어떻게 어겼는지까지 적은 실전 작법 에세이

(이미지나 삽화는 생성형AI를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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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문의

[칼럼]AI로 글을 쓰는 이들에게

2026년 8월 2일 이후에 나온 클로드 모델은 자기가 쓴 문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표식을 남긴다. 유럽연합 AI법이 요구하는 투명성 의무를 지키기 위한 조치다. 같은 규약에 서명한 회사가 190곳이 넘으니 다른 모델들도 곧 같은 길을 갈 것이다. 8월 중순에는 그 표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공개됐다.

소식이 퍼지자 반응이 꽤 뜨거웠다. 특히 글 쓰는 사람들 쪽이 그랬다. 내 원고가 AI 글로 낙인찍히는 것 아니냐, 공모전이나 출판사가 이걸로 걸러내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줄줄이 올라왔다. 어떤 이는 문장을 통째로 다시 쓸 방법부터 찾아 나섰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짚어 보자.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특수문자를 몰래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니다. 글에 무언가가 더해지지도 않고 숨은 글자도 없다. 대신 모델이 다음 단어를 고르는 방식에 손을 댄다.

언어모델은 한 번에 한 단어씩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 날씨는 춥고, 다음에 올 말이 흐림이든 잿빛이든 읽는 사람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 이렇게 어느 쪽이어도 괜찮은 자리에서 모델은 그동안 사실상 주사위를 굴려 왔다. 워터마크는 그 주사위를 열쇠가 든 주사위로 바꾼다. 나중에 열쇠를 가진 쪽이 문장을 훑으면, 선택의 흐름이 열쇠와 맞아떨어지는지 계산할 수 있다. 읽는 맛도, 값도, 속도도 그대로다. 누가 썼는지에 대한 정보는 애초에 담기지 않아 특정 계정이나 대화로 추적되지도 않는다.

한계도 분명하다. 글이 짧으면 고른 단어가 적어 표식이 잡히지 않는다. 문장을 전부 갈아엎으면 지워진다. 표식을 읽어 낼 열쇠도 아무나 가질 수 없어서, 지금은 규제 기관이나 언론, 연구자처럼 법이 정한 일부에게만 시범 제공되고 있다. 원고를 받자마자 플랫폼이 AI 여부를 판정해 버리는 그림은 적어도 당분간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표식이 무엇을 증명하지 못하는가다. 표식이 있다고 해서 그 글을 기계가 썼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쓴 원고를 번역시키거나 크게 손보게 해도 표식은 붙는다. 반대로 표식이 없다고 해서 사람이 썼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만든 회사 스스로가 그렇게 못을 박아 두었다. 이것은 유죄를 찍는 도장이 아니라, 기계가 한 번 지나갔다는 흔적일 뿐이다.

여기까지가 기술의 영역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있다.

표식은 아무 데나 붙지 못한다. 정답이 하나뿐인 자리에는 붙을 수가 없다. 뉴턴의 대표작은 프린키피아, 다음에 올 말은 정해져 있고, 코드에서 함수 이름을 기분에 따라 바꾸면 프로그램이 깨진다. 고를 여지가 없는 곳에는 표식이 살 자리도 없다.

맞춤법과 문장부호만 손봐 달라고 맡긴 원고도 마찬가지다. 단어의 대부분이 사람 것이니 기계가 내린 선택은 몇 개뿐이고, 그 몇 개로는 표식이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기계가 많이 쓸수록, 기계가 고른 자리가 쌓일수록 표식은 진해진다. 번역처럼 모든 단어를 기계가 새로 고른 글에는 표식이 빼곡히 남는다.

그러니까 이 표식이 재는 것은 결국 하나다. 이 글에서 나 대신 선택한 손이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질문도 옮겨 가야 맞다. 어떻게 하면 지울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까지 맡기고 있느냐는 쪽으로.

AI를 글쓰기에 쓰는 일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오탈자를 잡고, 늘어진 문장을 조이고, 같은 표현이 세 번 반복된 걸 짚어 주고, 날짜와 사실을 확인하고, 무너진 구조를 알려 주는 일. 이건 원래 편집자와 교정자가 하던 일이다. 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손을 빌려 왔고, 문학사에 남은 작품 상당수가 누군가의 붉은 펜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빌렸다고 해서 작품이 남의 것이 된 적은 없다. 밤늦게 초고를 소리 내어 읽어 줄 사람이 곁에 없는 이에게는 더더욱 고마운 손이다.

문제는 다른 자리에 있다. 고쳐 달라는 것과 만들어 달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부탁이다. 앞의 것은 도구를 쓰는 일이고, 뒤의 것은 공정을 넘기는 일이다. 그리고 창작을 공장에 넘기는 순간 세 가지가 무너진다.

첫째, 막히는 자리가 작가를 만든다. 글은 다 쓰고 난 뒤에 완성되는 게 아니라 막혀 있는 동안 만들어진다. 이 인물이 왜 하필 여기서 화를 내는지 몰라 사흘을 서성였다면, 그 사흘이 작가가 인물을 배운 시간이다. 그 자리를 기계에 넘기면 원고는 진도가 나가지만 쓰는 사람은 제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다음 작품, 똑같은 자리에서 또 막힌다. 영원히.

둘째, 그럴듯함을 아무리 쌓아도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언어모델은 원리상 가장 그럴듯한 다음 단어를 고르는 기계다. 평균 근처에서 가장 안전한 문장이 나온다. 실제로 AI 탐지 업체들이 짚어내는 특징이 딱 그렇다. 이건 무엇이 아니라 무엇이다, 같은 구문을 유난히 좋아하고, 조용히라는 부사를 사람보다 훨씬 자주 쓴다. 습관이 생겼다는 뜻이고, 습관은 곧 평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문장은 대개 그 반대편에 있다. 조금 어색하고, 남들은 그렇게 쓰지 않고, 그 사람이 아니면 나올 수 없었던 문장.

셋째, 설명할 수 없는 문장은 끝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이 장면에서 왜 비를 내렸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할 말이 없다면, 그 문단은 내 원고 안에 세 들어 사는 남의 문장이다. 세입자가 늘어날수록 작가는 자기 작품 안에서 손님이 된다.

속도 자체는 죄가 아니다. 매일 한 편씩 올리는 연재자는 예전에도 있었고, 마감에 쫓겨 하루 만에 밀어붙인 원고가 대표작이 된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빠르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속도를 어디서 벌었느냐다. 손이 빨라져서 벌었다면 실력이고, 판단을 넘겨서 벌었다면 외주다. 밖에서 보이는 숫자는 똑같아도 안에 남는 것은 정반대다.

요즘 이런 방식이 부쩍 늘었다. 소재를 던져 개요를 받고, 개요를 넣어 본문을 받고, 제목까지 받아 그대로 올린다. 사람 손이 닿는 곳은 발행 버튼뿐이다. 편수가 많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 달에 한 편만 올려도 그 한 편이 전부 받아 적은 것이라면 사정은 똑같다.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썼느냐가 아니라 그 문장을 누가 골랐느냐다.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쓴 것이 아니라 주문한 것이다.

창작은 근육에 가깝다. 쓰지 않으면 줄어든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고, 서툰 문장을 매일 쌓아 올린 사람만 남는다. 기계가 대신 채워 준 자리에는 근육이 붙지 않는다. 매일 한 편을 자기 손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1년 뒤에 반드시 달라져 있다. 같은 기간 같은 편수를 받아 적기만 한 사람은 1년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쌓인 원고는 비슷해 보여도 쌓인 사람이 다르다.

그래서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기준은 세 가지면 충분하다.

빈 화면은 내가 채운다. 첫 문장만큼은 기계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쓸지 정하는 일이 곧 작가의 일이니까.

만들어 달라고 하지 말고 고쳐 달라고 한다. 없는 것을 지어내게 하는 대신, 있는 것을 다듬게 하는 것이다.

받은 문장을 그대로 남기지 않는다. 아무리 잘 뽑힌 문장이어도 한 번은 내 손으로 다시 쓴다. 그 한 번이 남의 문장을 내 문장으로 바꾼다.

세 가지가 번거롭다면 질문 하나로 줄여도 된다. 이 문단을 왜 이렇게 썼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수 있는가?

오해를 살까 봐 덧붙인다. 옆에 AI를 켜 두고 글을 쓰는 일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도구는 늘 그런 식으로 들어왔다. 원고지가 워드프로세서로 바뀔 때도, 맞춤법 검사기가 처음 나왔을 때도 똑같은 논쟁이 있었고, 지금은 아무도 그걸로 작가의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새 도구는 언제나 먼저 의심받고 나중에 당연해진다. 다만 그 도구들은 쓰는 사람의 판단을 대신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맞춤법 검사기는 다음 장면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 정해 주지 않았다.

다시 워터마크로 돌아가 보자. 사실 작가에게는 훨씬 오래된 워터마크가 있었다. 문체다. 자주 쓰는 쉼표의 자리, 이상하게 자꾸 돌아오는 단어, 대사를 끊는 습관, 인물을 미워하지 못하는 성격 같은 것. 지우려 해도 잘 지워지지 않고, 옮겨 적어도 따라오고, 어설프게 흉내 내면 금세 티가 난다.

기계가 남긴 표식이 지워지느냐 마느냐는, 길게 보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무서운 쪽은 따로 있다. 원고를 다 쓰고 나서 읽어 봤는데 거기에 내 표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다.

표식이 두려운 사람은 대개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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